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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노트] 미디어아트를 실제 공간에 건다는 것, 영채(永彩) 구미코 설치 기록
![[작가노트] 미디어아트를 실제 공간에 건다는 것, 영채(永彩) 구미코 설치 기록](/limited/installations/gumico/facade-hero.jpg)
오늘 제 미디어아트 영채(永彩)가 경상북도 구미의 구미코(GUMICO)에 전달됐습니다. 건물 외벽의 대형 LED와 실내 패널에서 지금도 상영되고 있습니다.
작품을 판다는 것과, 그 작품이 실제 공간에 걸리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습니다. 현장에서 배운 것들을 정리해 두려 합니다.
저는 물을 찍지 않고 계산합니다
영채는 영상 파일이 아닙니다. 카메라로 물을 촬영해 편집한 것이 아니라, 코드가 실시간으로 색을 만들어 내는 제너레이티브 아트입니다.
물을 촬영하면 그 순간의 물 하나가 남습니다. 아름답지만 박제된 한 장면입니다. 저는 물의 결과가 아니라 규칙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유체가 압력을 따라 갈라지고, 소용돌이가 생기고, 다시 잦아드는 그 원리 자체를 코드로 옮기면, 화면은 매 순간 새로 계산되며 같은 장면을 두 번 만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 작품에는 '재생 시간'이라는 개념이 사실상 없습니다. 60초 심리스 루프로 납품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영을 위한 형식일 뿐입니다. 원리는 계속 돌아갑니다.
흐름을 공부하는 사람
올곧은 직선의 삶을 사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흘러가는 여울 같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아이와 지나가다 마주한 신천 여울에 박힌 돌처럼, 나의 꿈, 상상연필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버텨내는 저를 만나기도 했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물살을 막아 주는 저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런 흐름들은 가끔 괴롭기도, 기쁘기도, 놀랍기도 하지만, 흐름이 주는 미학은 저를 돌아보게 하는 즐거운 상상이 되기도 합니다.
제가 물을 계속 그리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미디어아트는 제게 기술 자랑이 아니라, 흐름이라는 것을 이해해 보려는 오랜 시도입니다.
방송용 포맷은 패널에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이번 납품을 위해 현장에 맞춰 영상을 새로 편집해 갔습니다. 그런데 패널에서 재생이 되지 않았습니다.
원인은 포맷이었습니다. 방송용 포맷으로 내보낸 파일을 재생기가 받아주지 않았고, 컴퓨터에서 직접 렌더링한 원본만 정상적으로 작동했습니다. 다행히 그 원본이 패널 규격에 맞아 화면은 잘 나왔습니다.
LED 패널의 재생기는 방송 장비가 아닙니다. 편집실에서 당연하게 쓰는 고품질 포맷이 현장 재생기에서는 열리지도 않습니다. 화질을 생각해서 좋은 포맷을 고른 것이 오히려 재생을 막은 셈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현장에서 화면이 안 켜지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이렇게 합니다.
- 납품 파일은 편집 마스터가 아니라 재생기가 확실히 받는 포맷으로 따로 뽑는다
- 렌더링 원본을 반드시 함께 가져간다
- 설치 전에 실제 재생기로 한 번 틀어본다
작품을 만드는 일과, 그 작품이 현장에서 켜지게 하는 일은 별개였습니다.
화면비는 공간이 정합니다
제 에디션은 한 작품당 여러 화면비의 원본으로 전달됩니다. 처음에는 이게 서비스 차원의 배려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니었습니다. 필수 조건이었습니다.
구미코에는 외벽 대형 LED, 로비 와이드 스크린, 세로형 패널, 에스컬레이터 상부 등 성격이 다른 화면이 여러 개 있습니다. 실제 운영에서는 이 패널들에 25:9 비율로 상영하고 계십니다. 제가 미리 정해 드린 것이 아니라, 공간을 아는 쪽에서 고르신 결과입니다.
여기서 배운 것은 분명합니다. 작가가 화면비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이 정한다는 것. 그래서 저는 작품을 넘길 때 하나의 정답을 주는 대신 선택지를 드리고, 필요하면 그 공간 전용으로 다시 렌더링해 드립니다.
공공 공간에 건다는 것
갤러리에 걸린 작품은 보러 온 사람이 봅니다. 건물 외벽에 걸린 작품은 보러 오지 않은 사람이 봅니다.
주차하러 온 사람, 회의 때문에 들른 사람, 그냥 지나가던 사람. 이들은 작품을 감상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설명을 읽지 않으며, 몇 초 뒤면 시선을 거둡니다.
그래서 공공 공간의 미디어아트는 겸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설명 없이 이해되어야 하고, 매일 지나가도 질리지 않아야 하며, 무엇보다 그 공간의 일을 방해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오래 머무는 곳이라면 자극적인 화면은 결국 민원이 됩니다.
물을 그리는 작업이 이 조건에 잘 맞았습니다. 물은 누구나 압니다. 배경처럼 흘려보내도 되고, 마음먹고 들여다봐도 됩니다. 보는 사람이 관여도를 정할 수 있는 화면. 저는 공공 미디어아트가 그래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건 데이터로 남습니다
제 작품은 1점 유일(1 of 1) 에디션으로 판매됩니다. 원본 파일과 함께 진본 확인서(COA)와 파일 무결성 해시(SHA-256)를 드리고, 영상 안에 작가 서명과 에디션 번호를 새기며 저희 판매사이트에도 구매자의 이름과 지역을 넣습니다.
디지털 작품은 복제가 쉽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이 파일이 원본이다'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구조가 중요합니다. 물리적 캔버스가 없는 대신, 검증 가능한 기록이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다음 작업으로
구미코에서 돌아오며 든 생각은 하나였습니다. 작품은 파일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
화면의 크기, 사람이 서는 거리, 그 공간이 하는 일까지가 작품의 일부입니다. 다음 작업은 이 조건들을 처음부터 계산에 넣고 시작하려 합니다.
흘러가는 강물에 몸을 맡긴 우리처럼, 저도 그런 흐름을 앞으로도 그려 나가고 싶습니다.
상상연필 대표이자, 미디어아티스트 홍석범